AI · 기술과 규범
베끼기인가, 배우기인가 — AI ‘증류’ 논란
11일 사이에 중국의 새 AI 모델이 등장했고, 백악관은 도둑질을 지목했고, 중국은 패권주의라고 맞받았습니다.
그 한가운데 ‘증류(distillation)’라는 낯선 용어가 있습니다. 이 글은 그 단어의 뜻부터,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부터가 반칙인지까지를 정리해보겠습니다.
11일 사이에 벌어진 일
2026년 7월 16일, 중국의 AI 기업 문샷AI(Moonshot AI)가 상하이에서 새 모델 키미 K3(Kimi K3)를 공개했습니다. 2조 8,000억 개의 매개변수를 가진, 지금까지 공개된 것 중 가장 큰 규모의 개방형 모델입니다. 일부 코딩 평가에서는 미국 최상위 모델들을 앞질렀습니다.
사흘 뒤인 19일, 문샷은 이용자가 몰려 신규 구독을 일시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22일,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장 마이클 크라치오스가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립니다. 문샷이 미국 엔트로픽의 모델을 ‘증류’해 K3를 만들었다는 정보를 갖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같은 날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제재와 수출통제 명단 등재를 검토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27일, 중국 상무부가 답했습니다. 미국이 사실적·법적 근거 없이 중국 기업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는 ‘AI 패권주의’라고 규정하고,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 모든 다툼의 중심에 ‘증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이 왜 절도가 될 수도 있고 정상적인 기술이 될 수도 있는지는 좀처럼 설명되지 않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증류란 무엇인가
영어로는 distillation, 우리말로는 증류 또는 지식 증류라고 옮깁니다. 술을 내리듯 큰 모델에서 핵심만 뽑아낸다는 비유에서 온 이름입니다.
구조는 단순합니다. 이미 잘 만들어진 교사 모델에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그 답변을 모아서 학생 모델을 가르치는 데 씁니다. 학생은 교사의 답을 따라 하면서 교사의 실력에 가까워집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구분이 나옵니다. 질문을 던져서 얻는 것은 상대 모델의 설계도나 내부 수치가 아닙니다. 얻는 것은 답변, 그리고 그 답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쪼개는지, 코딩 오류를 어떻게 찾아 고치는지, 도구를 어떤 순서로 불러 쓰는지, 좋은 답과 나쁜 답을 어떤 기준으로 가르는지 같은 것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교과서를 훔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 강사가 직접 푼 풀이집과 채점 기준표를 대량으로 확보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강사의 머릿속을 가져올 수는 없지만,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풀이 수만 개를 보면 상당 부분 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법 자체는 전혀 불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업계 표준에 가깝습니다. 엔트로픽도 자사 블로그에서 증류가 널리 쓰이는 정당한 학습 방법이며, 프런티어 기업들이 자기 모델을 증류해 더 작고 저렴한 버전을 만드는 일이 일상적이라고 명시했습니다. 오픈AI는 아예 자사 플랫폼 안에서 증류 기능을 상품으로 제공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요. 누구의 모델을, 어떤 권한으로, 어떤 방식으로 썼는가입니다.
엔트로픽이 실제로 주장한 것
이번 논란의 근거 자료는 대부분 엔트로픽이 스스로 공개한 조사 결과입니다. 2026년 2월 23일, 엔트로픽은 세 개의 중국 AI 연구소가 산업적 규모의 증류 캠페인을 벌였다고 발표했습니다. 약 2만 4,000개의 부정 계정으로 1,600만 건이 넘는 대화를 생성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흔한 오해를 하나 바로잡아야 합니다. 1,600만 건이 문샷이나 딥시크 한 곳의 수치가 아닙니다. 기업별로 나누면 격차가 큽니다.
| 기업 | 규모 | 주로 노린 능력 |
|---|---|---|
| 알리바바 Qwen | 2,880만 건+ | 별도 건 — 2026년 6월 미 상원 은행위원회 서한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최대 규모”로 지목 |
| MiniMax | 1,300만 건+ | 에이전틱 코딩, 도구 사용과 오케스트레이션 |
| 문샷AI | 340만 건+ | 에이전트 추론과 도구 사용, 코딩·데이터 분석, 컴퓨터 사용, 컴퓨터 비전 |
| 딥시크 | 15만 건+ | 추론, 루브릭 기반 채점, 민감 질문의 검열 대응 답변 |
무엇을 근거로 특정 기업을 지목했나
엔트로픽은 IP 주소의 상관관계, 요청에 딸려 오는 메타데이터, 인프라 지표, 그리고 같은 행위자를 자기 플랫폼에서 관측한 업계 파트너의 확인을 종합했다고 밝혔습니다. 딥시크의 경우 요청 메타데이터를 따라가 특정 연구자 계정까지 좁혔고, 문샷의 경우 메타데이터가 회사 고위 인력의 공개 프로필과 일치했다고 합니다.
정황 중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MiniMax 건입니다. 엔트로픽은 이 캠페인이 진행 중일 때 탐지했는데, 자사가 새 모델을 출시하자 MiniMax가 24시간 안에 트래픽의 절반가량을 새 모델 쪽으로 돌렸다고 밝혔습니다. 일반적인 이용 패턴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움직임입니다.
‘하이드라 클러스터’란
엔트로픽은 국가안보를 이유로 중국에 클로드를 상업적으로 판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접근 자체가 우회를 통해 이뤄졌다는 것이 엔트로픽의 설명입니다. 프록시 업체들이 수많은 계정을 만들어 트래픽을 분산시키는 구조를 하이드라 클러스터라고 부릅니다. 머리 하나를 자르면 다른 머리가 자라는 그리스 신화의 괴물에서 따온 이름으로, 계정 하나가 차단돼도 곧바로 다른 계정이 대체합니다. 한 프록시망은 2만 개가 넘는 계정을 동시에 운영했다고 합니다.
다만 짚어둘 것이 있습니다. 엔트로픽은 로그 원자료 전체를 외부에 공개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공개된 것은 당사자 한쪽의 조사 결과이고, 독립 기관의 검증을 거친 자료는 아닙니다. 지목된 기업들은 대체로 응답하지 않았고, 중국 정부는 근거 없는 비방이라는 입장입니다.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부터가 반칙인가
‘증류’를 하나의 덩어리로 놓고 옳다 그르다를 따지면 논쟁이 끝나지 않습니다. 네 단계로 나눠 보면 훨씬 선명해집니다.
정상적인 증류
자기가 가진 상위 모델로 소형 모델을 만들거나, 제공자가 명시적으로 허용한 범위에서 출력을 쓰는 경우. 업계의 일상적인 개발 기법입니다.
이용약관 위반
약관이 경쟁 모델 개발을 금지하는데도 출력을 학습에 쓴 경우. 계약 위반이지만, 곧바로 범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정 계정과 프록시를 통한 접근 우회
가짜 계정, 대리 결제, 프록시 서버로 지역 제한과 탐지를 피한 경우. 여기서부터는 ‘약관 해석의 차이’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회피할 의도가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법률상 지식재산 절도
모델의 ‘능력’이나 ‘답변 방식’을 어디까지 재산권으로 보호할 수 있는지, 이용자가 생성한 출력의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지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문제입니다. 법원의 판단이 필요합니다.
지금 공개된 자료가 가리키는 지점은 ③번입니다. 엔트로픽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부정 계정과 프록시 우회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뒷받침됩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쓰는 단어는 ‘절도’, 즉 ④번입니다.
약관 위반과 접근 우회 의혹은 매우 구체적이지만,
법률상 ‘지식재산을 훔쳤다’는 결론이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제재라는 수단이 ④번을 전제로 정당화되기 때문입니다. ③번까지만 확인된 상태에서 ④번의 언어를 쓰면, 그것은 법 집행이라기보다 통상 압박에 가까워집니다.
덧붙여 — 미국은 떳떳한가
중국 측이 자주 꺼내는 반론이 있습니다. 미국 AI 기업들도 인터넷의 기사·책·이미지·코드를 저작권자 동의 없이 학습에 썼으면서, 자기 모델의 출력이 남의 학습에 쓰이자 절도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 지적에는 분명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만 두 사안이 같지는 않습니다. 웹 학습은 공개된 자료를 광범위하게 긁는 방식이고, 이번 건은 특정 경쟁 모델의 고부가가치 능력을 지역 제한을 우회해 집중적으로 뽑아냈다는 혐의입니다. 도덕적으로는 이어져 있지만, 계약과 접근 방식에서는 층위가 다릅니다.
그럼에도 이 질문은 남습니다. 인간의 창작물을 허락 없이 학습한 모델이 만든 출력에 대해, 그 기업은 얼마나 강한 독점권을 주장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미국 기업들에게도 불편합니다.
그렇다면 K3의 성능은 무엇으로 설명되나
가장 궁금한 대목입니다. 키미 K3가 미국 최상위 모델에 근접한 것은 결국 베낀 덕분일까요.
증류 데이터가 아무리 좋아도 대신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증류로 얻을 수 있는 것
- 어려운 문제를 분해하는 방식
- 코드 오류를 찾고 고치는 요령
- 도구를 호출하는 순서와 판단
- 답변의 좋고 나쁨을 가르는 기준
- 긴 작업에서 중간 결과를 점검하는 습관
증류로 얻을 수 없는 것
- 2조 8,000억 개 매개변수를 안정적으로 학습시키는 분산 시스템
- 896개 전문가 중 16개만 골라 쓰는 초희소 구조 설계
- 100만 토큰 문맥을 감당하는 어텐션 구조
- 저정밀 연산을 학습 단계부터 반영하는 최적화
- 수십 개 가속기를 묶어 실제로 서비스하는 인프라
문샷은 K3에 키미 델타 어텐션, 어텐션 레지듀얼, 스테이블 레이턴트 MoE 같은 자체 구조를 적용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것들은 클로드에 질문을 아무리 많이 던져도 얻어지지 않습니다.
MoE — 전문가 혼합
모델 전체를 매번 다 쓰는 대신, 질문에 맞는 일부 ‘전문가’ 신경망만 골라 쓰는 구조입니다. K3는 896개 중 16개만 켭니다. 덕분에 총 규모는 2조 8,000억 개지만 실제 계산량은 그 일부에 그칩니다. 대형 병원에 의사가 수백 명 있어도 환자 한 명은 필요한 과 몇 곳만 거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다음 두 문장은 동시에 참일 수 있습니다.
하나, 중국 기업들이 클로드의 출력을 허락 없이 학습에 활용했다. 둘, 중국 기업들이 모델 구조와 학습·추론 최적화에서 실질적인 혁신을 이뤘다.
시점을 따져 보면 더 조심스러워집니다. 백악관이 지목한 것은 엔트로픽의 최신 모델 ‘페이블 5’를 증류했다는 것인데, 이 모델은 6월에 공개됐고 K3는 7월 16일에 나왔습니다. 2조 8,000억 개 규모의 모델에 그 출력을 반영하기에는 창이 매우 좁습니다. 2월에 지목된 340만 건과 이번 K3 의혹은 서로 다른 사건일 가능성이 있고, 아직 어느 쪽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엔트로픽 자신도 중국 랩들의 발전이 미국 모델에서 추출한 능력에 “상당 부분” 의존한다고 표현했지, 전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은 아무 기술 없이 베끼기만 했다”는 서사는 정치적 메시지로는 강력하지만, 기술적으로는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미국 입장에서 더 껄끄러운 지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단순한 복제품이라면 차단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밖에서 흡수한 지식과 자체 공학이 결합된 경쟁자는, 시간이 갈수록 교사에 대한 의존을 줄이면서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 갑니다.
가중치가 답할 것
이 논쟁은 지금 증거가 부족한 상태에서 각자의 언어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쪽은 ‘절도’라 부르고, 다른 쪽은 ‘패권주의’라 부릅니다. 그 사이에서 확인된 사실은 생각보다 좁습니다. 대규모 우회 접근이 있었다는 정황은 구체적이고, 그것이 성능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아직 아무도 독립적으로 검증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검증의 단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문샷은 7월 27일에 K3의 가중치와 기술보고서를 공개하겠다고 예고했습니다. 학습 데이터의 구성과 후학습 방식이 어디까지 서술되는지가 이 논쟁의 다음 증거가 됩니다. 물론 기업이 공개하는 보고서에 불리한 내용이 상세히 담기리라 기대하기는 어렵고, 공개된 가중치를 연구자들이 뜯어보며 나올 분석이 오히려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단어 하나로 결론을 내리기 전에, 그 단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부터 볼 필요가 있습니다. 베끼기와 배우기 사이의 경계는 아직 그어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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