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정부부채가 크게 늘어난 가운데, 높은 금리까지 장기간 이어지면서 정부가 과연 현재의 이자비용을 계속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2026년 7월 IMF는 금융억압을 주제로 흥미로운 Working Paper를 발표했다.
17개 선진국의 1920~2020년, 약 100년의 데이터를 이용해 금융억압이 언제 강해졌고 실제로 정부부채를 얼마나 줄였는지 추적한 연구다.
New Measures and a Century of Evidence
금융억압은 흔히 “인플레이션보다 금리를 낮게 유지해 정부부채를 녹이는 정책” 정도로 설명된다.
그러나 이번 IMF 연구는 조금 더 좁고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바라본다.
금융규제와 제도를 통해 은행 등 금융기관이 정부부채를 시장에서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준 이상으로 보유하도록 만들고, 그 구조적인 수요를 이용해 정부의 자금조달 비용을 낮추는 것이다.
국가는 금융시스템을 이용해 이자비용을 낮춰왔을까?
1. IMF가 바라보는 금융억압
이번 연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금융억압을 측정하는 방법이다.
연구진은 단순히 실질금리가 낮았는지를 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핵심 개념은 Captive Buyer, 즉 시장수익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부부채의 구조적 수요자다.
논리는 간단하다.
정부채권의 수익률이 주식이나 부동산 등 민간자산보다 낮아진다면, 일반적인 투자자는 정부채권의 비중을 줄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은행의 국채 보유비중이 오히려 높아진다면?
IMF는 그 차이 가운데 시장수익률이나 일반적인 포트폴리오 선택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을 규제에 의해 만들어진 국채수요의 흔적으로 본다.
재정적 금융억압과 통화적 금융억압
은행이 정부채권을 상대적으로 많이 보유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유동성 요건, 자본규제, 포트폴리오 요건, 국채의 담보적격성 등이 수단이 될 수 있다.
은행이 중앙은행 준비금 등 공공부문 부채를 시장의 대체자산보다 낮은 보상으로 보유하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IMF는 QE 자체를 자동적으로 금융억압이라고 분류하지 않는다.
QE는 원래 경기안정과 통화정책을 목적으로 시행되며, 은행은 국채를 중앙은행에 팔고 준비금을 받기 때문이다.
다만 정책의 명칭이나 표면적인 목적보다, 결과적으로 금융기관이 시장에서 선택했을 수준보다 더 많은 공공부문 부채를 낮은 수익률로 떠안게 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 이 연구의 접근이다.
2. 100년을 돌아보니? 금융억압은 사라지지 않았다
연구진은 17개 선진국의 장기 데이터를 이용해 1920년 이후 금융억압의 흐름을 복원했다.
결과는 상당히 명확했다.
즉 금융억압은 2차대전 이후 사라져버린 과거의 정책이 아니었다.
1980~90년대 금융자유화 과정에서 크게 약해졌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다시 상승하는 U자형 흐름이 나타났다.
언제 금융억압이 강해졌을까?
증가
증가
수익률
정부부채/GDP 또는 정부 이자비용/GDP가 1표준편차 높을 때 금융억압 지표는 약 0.2~0.4 표준편차 높게 나타났다.
또한 금융억압이 강한 국가일수록 단기금리와 장기국채금리가 낮았고, 정부채권의 수익률도 주식과 부동산 같은 민간자산에 비해 낮은 경향을 보였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낮은데도 은행의 정부채권 보유가 늘어났다.
그리고 은행의 자금이 정부채권으로 이동한 만큼 민간경제 쪽에서는 신용증가율과 투자율이 낮아지는 구축효과(Crowding Out)도 함께 관찰됐다.
그 과정에서 민간이 사용할 자본은 줄어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실제 정부부채를 줄이는 데 효과가 있었을까?
이 논문의 답은 그렇다에 가깝다.
특히 모든 국가의 금융억압에 따른 연간 재정절감 효과 중앙값은 2008년 GDP의 약 0.08%에서 2020년 약 0.51%까지 다시 상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IMF 연구가 던지는 메시지는 꽤 명확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다시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3. 지금은? 미국에서 보이는 새로운 정책의 조합
이번 IMF 보고서의 핵심 실증 데이터는 2020년까지다.
따라서 2025~2026년 미국 정책을 IMF 연구가 직접 분석한 것은 아니다. 연구진 역시 향후 데이터를 2025년까지 확장해 코로나 이후 인플레이션과 글로벌 통화긴축기의 금융억압 변화를 추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연구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이유가 있다.
IMF가 지난 100년 동안 발견했던 ‘금융억압이 강해지는 조건’ 가운데 일부가 다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정부부채와 막대한 이자비용, 재정긴축의 정치적 어려움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2026년 미국에서는 국채시장을 둘러싸고 두 가지 정책 변화가 특히 흥미롭다.
공식적으로 제시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미 국채시장 중개처럼 위험은 낮지만 대차대조표를 많이 사용하는 활동에 대한 규제상 불이익을 줄이는 것이었다.
공식 목적은 장기국채 시장의 유동성 지원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금융억압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직 그렇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특히 eSLR 완화는 IMF가 말하는 전통적인 Captive Buyer와는 메커니즘이 다르다.
실제로 2025년 최종 eSLR 개편 과정에서는 더 강한 방안도 논의됐다.
미 국채와 연준 준비금을 SLR 계산의 분모에서 아예 제외하자는 의견도 제기됐지만, 최종 규칙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 미국을 “은행을 동원해 국채를 강제로 떠넘기는 금융억압 체제”라고 표현하는 것은 과도하다.
다만 베센트 재무부가 금융규제 전반의 Regulatory Reset을 추진하는 가운데, 은행의 Treasury 중개 제약은 완화되고 재무부는 장기국채 바이백까지 확대했다.
각각의 정책은 정상적인 금융시장 안정과 규제 효율화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고부채 환경에서 이 정책들을 함께 놓고 보면 국채의 시장 소화능력을 높이고 장기금리 상승압력을 완화하는 방향이라는 공통점도 존재한다.
다만 과거와 현재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IMF 연구진도 현대의 금융억압이 과거와 동일한 강도로 작동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고 본다.
정부가 금융기관을 통해 국채수요를 만들더라도 돈은 다른 국가, 다른 자산, 다른 금융기관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보고서는 CBDC, Stablecoin, DeFi 같은 새로운 금융기술까지 언급한다.
CBDC는 금융억압의 적용범위를 은행 밖으로 넓힐 가능성이 있는 반면, Stablecoin과 DeFi는 저축자에게 기존 규제 금융시스템 밖의 가치저장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전통적인 금융억압을 약화시킬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4. IMF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보고서의 제목은 상당히 도발적이다.
거대한 금융억압이 다시 오는가?
하지만 보고서를 끝까지 읽으면 저자들이 “금융억압을 활용해 정부부채를 해결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연구의 목적은 측정하고 경계하는 것에 더 가깝다.
역사를 보면 금융억압은 정부부채를 줄이는 데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정부가 얻은 편익은 공짜가 아니었다.
국채에 대한 구조적인 수요가 증가하면서 정부의 자금조달 비용이 낮아지고, 높은 정부부채를 더 오랜 기간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은행 자금이 정부채권 쪽으로 이동하면 기업대출과 민간투자를 위한 자금이 줄어들고 저축자는 시장보다 낮은 수익률을 감수할 수 있다.
실제로 IMF 데이터에서도 금융억압이 강한 국가에서는 민간 신용증가율이 낮고, 대출/예금 비율이 낮으며, 투자/GDP도 낮은 경향이 나타났다.
그 비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그 비용을 부담한다.
과거에는 그것이 낮은 수익률을 받아들여야 했던 국내 저축자였고, 기업에 공급되지 못한 민간 자본이기도 했다.
그래서 IMF 연구진은 이번 분석이 금융억압을 권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명확히 설명한다.
오히려 금융억압은 금융발전과 경제성장에 왜곡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정책당국이 명시적으로 금융억압을 선언하지 않더라도 금융시스템이 그 방향으로 서서히 Drift하고 있는지를 측정하고 감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보고서의 중요한 결론이다.
마치며|그렇다면 주요국은 거대한 정부부채를 어떻게 해결할까?
이 보고서를 모두 읽고 나면 결국 더 큰 질문 하나가 남는다.
이미 크게 늘어난 주요국의 정부부채를 앞으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세금을 늘리고 정부지출을 줄여 직접적으로 재정수지를 개선한다.
정부부채보다 명목경제를 더 빠르게 성장시켜 부채비율을 낮춘다.
물가와 명목소득을 높여 기존 명목부채의 실질가치를 낮춘다.
금융시스템을 이용해 정부의 실질 자금조달 비용을 시장수준보다 낮게 유지한다.
물론 채무재조정이나 디폴트 같은 방법도 존재한다.
하지만 주요 선진국에게는 경제적·정치적 비용이 너무 큰 극단적인 선택에 가깝다.
가장 이상적인 해법은 높은 경제성장과 점진적인 재정건전화일 것이다.
문제는 현실이다.
증세와 지출삭감은 정치적으로 어렵다. 구조개혁은 시간이 필요하다. 경제성장률도 정부가 원하는 만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 정부부채의 이자는 매일 쌓인다.
주요국은 과연 어떤 조합을 선택하게 될까?
재정건전화일까. 성장일까. 인플레이션일까.
아니면 IMF가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확인한 것처럼 금융억압이 다시 부채관리의 한 축으로 조용히 돌아오게 될까?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금융시스템이 이미 조금씩 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앞으로 몇 년 미국과 주요 선진국의 정부부채, 은행규제, 국채시장 그리고 장기금리를 바라볼 때 기억해둘 만한 질문이다.
Marijn A. Bolhuis · Jakree Koosakul · Neil Shenai · Jie Yang
The Coming Great Repression? New Measures and a Century of Evidenc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July 31, 2026.
Modifications to the Enhanced Supplementary Leverage Ratio Standards, Final Rule, November 2025.
2026년 4월 1일 시행.
A Reset on Liquidity Regulation, March 3, 2026.
Treasury Announces Increased Sizes of Nominal Long-End Liquidity Support Buybacks Beginning September 9, August 19, 2026.
※ IMF 보고서의 핵심 실증표본은 17개 선진국의 1920~2020년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다. 2025~2026년 미국 정책에 대한 내용은 보고서의 직접적인 실증결과가 아니라, 보고서가 제시한 금융억압의 역사적 메커니즘과 최근 미국 정책을 비교하기 위해 별도로 추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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