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 내가 바라보는 세상
AI의 시대,
지식의 희소성이 사라진다면?
지식이 공짜가 되는 세상에서,
무엇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게 될까.
우리 사회는 지금,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기초? 근간이 흔들리는 중이다. 파열음도 없고 뉴스 속보도 없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아는 것’의 값이 예전 같지 않다는 감각이, 일하는 사람들 사이로 서서히 번지고 있다.
현대사회는 ‘지식이 귀하다’는
전제 위에 지어졌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제도 대부분은 지식이 희소하다는 가정 위에 서 있다. 대학이 존재하는 이유가 그렇고, 임금에 차이가 나는 이유도, 전문가가 대접받는 이유도 결국 그 지식을 가진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조직의 위계 역시 본질적으로 정보의 위계다. 위로 갈수록 더 많이 안다는 전제로 굴러간다.
그런데 그 전제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예전 같으면 며칠이 걸렸을 조사와 정리가 이제는 몇 분 만에 끝난다. 처음엔 신기했고, 그다음엔 편했고, 이제는 조금 서늘하다.
그렇다면 지식이 흔해진 사회에서는 무엇이 귀해지는가. 여기서부터가 진짜 이야기다. 희소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리를 옮길 뿐이다.
지식이 공짜가 되면,
질문이 값어치가 있어진다.
힌트는 이미 우리 일상에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볼 것’이 무한해진 시대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인가. 30분 동안 스크롤만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잠드는 밤이다. 볼 게 없어서가 아니다. 무엇을 보고 싶은지 모르기 때문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월 만 원이면 인류의 모든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자, 갑자기 ‘플레이리스트’와 ‘취향’이 값을 갖기 시작했다. 공급이 무한해지는 순간 병목은 옮겨간다. 가질 수 있는가에서 원하는가로.
비유하자면 모두에게 램프의 지니가 하나씩 주어진 세상이다. 지니의 능력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그렇다면 격차는 어디서 발생하는가. 소원의 품질에서 발생한다. 애매하게 비는 사람은 애매한 것을 받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만이 지니를 제대로 부린다.
지식은 AI에 넘어가고,
우리에겐 가치판단만 남는다.
일의 세계에 대입하면 더 선명해진다. 계산하고, 자료를 정리하고, 문서를 만드는 일. 냉정하게 말해 이것은 시간문제다. 기계가 더 잘하게 될 것이고, 이미 상당 부분 그렇다.
그러나 끝까지 남는 질문이 있다. “이 제도는 애초에 무엇을 지키려고 만들어졌는가.” “우리는 어느 정도의 위험까지 감수할 것인가.” 이것은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 판단의 문제이며, 사회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합의의 문제다. 기계가 아무리 똑똑해져도 이것만은 대신 정해줄 수 없다. 아니, 정해줄 수 있게 되더라도 그것을 통째로 위임하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는다.
문서를 잘 만드는 사람은 대체되고,
무엇을 요구할지 정하는 사람은 남는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자동화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값이 오르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이다. 같은 힘이 어떤 것은 밀어내고, 어떤 것은 끌어올린다.
그렇다면,
사회는 어떻게 먹고살까?
여기서 가장 현실적인 질문이 나온다. 아무리 그럴듯한 전망도 생계 앞에서는 무력하다. 임금이란 결국 ‘희소한 능력의 가격’이다. 지식이 흔해지면 지식노동의 가격은 내려간다. 불편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소득은 여러 겹이 될 가능성이 크다. 노동에서 나오는 소득이 한 겹, 자본에서 나오는 소득이 한 겹, 그리고 언젠가는 사회 차원의 분배가 또 한 겹. 기계가 부를 만들면 그 부는 기계를 소유한 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는 결국 정치의 문제가 된다.
다만 여기에 낙관도 비관도 필요 없다. 산업혁명 당시에도 노동법과 복지제도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다. 한참 뒤에, 꽤 시끄러운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 ‘한참’의 틈, 임금은 먼저 무너지는데 제도는 늦게 오는 그 구간이 가장 험할 것이다.
그리고 이 논쟁은,
이미 시작됐다
먼 미래의 사고실험처럼 들리지만, 사실 이건 지금 전 세계가 거의 동시에 꺼내 든 의제다. 부의 원천이 자본으로 넘어가면 격차의 축은 ‘누가 자산을 가졌는가’로 바뀐다. 임금 격차는 노력으로 좁힐 여지라도 있지만, 자산 격차는 복리로 벌어지고 상속으로 세습된다. 그래서 각국이 서둘러 ‘나누는 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주요 AI 기업이 지분의 일부를 정부 기금에 내놓고 그 수익을 국민에게 배당하자는 구상이 나왔고, 의회에서는 훨씬 공격적으로 대형 AI 기업 주식의 상당 부분을 세금으로 걷어 공공펀드를 만들자는 법안까지 발의됐다. 발상의 뿌리는 오래된 실험에 있다. 알래스카는 1980년대부터 석유 기금 수익을 주민 전체에게 매년 배당해 왔다.
한국도 구경꾼이 아니다. 오히려 시점만 보면 더 빨랐다. 반도체·AI 호황이 만들어낸 초과 세수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두고 ‘국민배당금’이라는 이름의 논의가 공개적으로 제기됐다. 흥미로운 건 그다음이었다. 이 논의가 나오자마자 시장이 출렁였고, 곧바로 “개인 의견”이라며 한발 물러서는 장면이 뒤따랐다. 분배를 제도화하려는 시도와, 자본이 즉각 반응하는 힘이 정면으로 부딪힌 것이다. 앞의 그림에서 점선으로 그렸던 그 층이, 왜 저절로 채워지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축소판이었다.
그래서,
예상되는 세상
전환은 한 번에 오지 않는다. 대략 네 개의 국면을 지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중 진짜 위험한 구간은 기술이 정점을 찍는 때가 아니라, 임금은 이미 무너졌는데 새 제도는 아직 오지 않은 그 사이의 시차다.
그 세상의 하루는 의외로 SF 같지 않을 것이다. 사무직이라는 말이 옛말이 되고, 책임지는 사람과 무엇을 원할지 정하는 사람만 남는 대신, 사람을 마주하는 일은 오히려 늘어난다. 간병과 보육, 코치와 트레이너, 그리고 스포츠. 로봇이 시속 200킬로미터를 던질 수 있는 시대에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정확히 그 반대, 다칠 수 있는 인간이 흘리는 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두가 ‘원하는 대로’ 살진 않는다
여기서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원하는 것을 정의하고 그것을 향해 살지 않는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야 하니 일어나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야 하니 보내고, 갚아야 할 것이 있으니 출근한다. 그리고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값에 가깝다. “너는 무엇을 원하니”는 사실 여유 있는 사람의 질문이다.
그래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걸 정의하게 될까’가 아니라, 구조가 사라진 자리를 무엇이 채우는가로. 빈자리는 반드시 채워지기 때문이다. 스스로 채우지 않으면 누군가가 채워준다. 저녁에 무엇을 볼지 스스로 정하지 않으면 알고리즘이 정해주듯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면, 원하도록 설계된 것을 원하게 된다.
사람들이 일하는 진짜 이유가 대개 자아실현이 아니라, 갈 곳이 있고 불릴 이름이 있고 하루에 형태가 생기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답이 보인다. 그 기능을 오랫동안 회사가 공짜로 대행해 줬을 뿐이다. 그것이 약해지면 대다수는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붕 뜬다. 그러므로 앞으로 진짜 희소해지는 것은 개인의 각성이 아니라, 사람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는 구조 그 자체다. 동네, 팀, 동호회, 공동체 같은 것들이다.
남는 질문
지식이 흔해지는 흐름은 막을 수 없고, 그것이 나쁜 일도 아니다. 문맹률이 낮아진 것이 나쁜 일이 아니었듯이. 문제는 언제나 그다음이다. 답이 공짜가 되면 질문이 비싸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전부가 된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공부는 방향이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 더 많이 아는 쪽이 아니라, 무엇을 원하는지 더 또렷하게 아는 쪽. 사실 후자가 훨씬 어렵다. 검색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이 어디까지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결국 이 질문 하나로 수렴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현대사회는, 생각보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